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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이해
이영호 선교사님 (루마니아)
<말라기 4장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그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하며>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하나님이 구약성경 마지막에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세상 마지막과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 똑 같은 표현을 선지자 요엘도 말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욜2:31)
주님의 재림, 휴거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나서 큰 사역을 감당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교회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세상이 다 되었다고 말하면서 종말 선지자 엘리야의 나타남과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의 초림에 차지하는 비중처럼 주님의 재림 때에 종말 선지자 엘리야의 사역은 더욱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세례 요한을 세상이 바로 알지 못한 것처럼 종말 선지자를 바로 아는 자는 소수일 것이다(마11:12)
“선지자”라는 단어는 구약시대의 분위기에서 친숙한 것이 사실이다. 신약에도 나타나지만 구약에서 보다는 그 비중이 떨어진다. 신약은 사도들의 사역이 더 두드러진다. 그런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도나 선지자라는 단어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다. 성경시대의 단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경은 그것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만 있었던 하나님의 사역자들 이라고 말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러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단어들이 오늘날 생소하게 되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박해 기간 이후 AD 70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권화된 교회는 급격히 타락하게 되었다. 역사에 기록된 대로 암흑시대가 길어졌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인내하며 많은 선지자를 보내었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인내를 멸시하며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침묵하셨다. 이것은 충격요법이다. 그리고는 큰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고 예수님이 오셨다. 이와 같은 일이 기독교의 암흑시대 때에도 나타났다. 때로는 하나님의 긴 침묵, 때로는 교회가 들을 귀가 없어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해도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선지자`라는 말은 더욱 생소하게 되었다. 그 개념조차도 마음에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많다.
또한 교회가 어두워졌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신학이 많이 생겨서 소위 말씀 이외에는 선지자와 사도의 직접 계시, 꿈과 환상, 심지어는 기적까지도 모두 부인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사상들이 생기면서 교회는 더욱 어두워졌다. 교회는 이러한 분위기에 빠지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잘못된 지식적 훈련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를 왜곡된 학문적 시각이 아닌 성경적 시각을 가지고 다시 살펴 볼 때가 되었다.
2010년 한국에 케냐인 데이비드 오워 박사가 와서 한국과 세계 상황에 관련된 종말적 예언 메시지를 선포했다. 또한 과연 이분의 사역과 메시지가 성경적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말의 시대에 이 사안은 중요한 일이므로 개인적으로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아래의 내용을 정리하게 된 것을 밝힌다.
1. 선지자의 의미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는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는 범죄 후 에덴에서 추방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시며 그들이 돌이키기를 바랬으나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을 피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숨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출애굽기에도 나타난다. 에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주 나타나 말씀하실 때에 회개하지 못한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과 모세에게 특별한 요청을 한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 점차 사라지고 대리자,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게 된 것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죄악성 때문이다. 선지자 모세는 그 백성에게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통치하셨다. 즉 선지자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공식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이스라엘의 왕도 선지자로부터 세움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렀다.(신33:1 왕상13:6)
2. 엘리야 이해
모세와 더불어 선지자 엘리야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를 중에서 특별하다. 예수님이 변화되었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하였다. 엘리야는 모세와 같이 그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임 받았다. 특히 모세와 엘리야는 큰 기도의 사람이고 그 백성을 생명을 다해서 사랑했다. 또한 이들의 사역은 확실한 후계자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엘리야는 불말과 불수레로 회리바람 가운데 들리움을 받았고 모세도 신비스런 죽음을 맞았는데 그 둘이 예수님에게 나타난 일 또한 신비스럽다.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서 4장에 하나님이 다시 엘리야가 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오늘도 그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3. 세례요한 이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라고 제자들에게 확인해 주셨다.(마17:12) 누가복음 1장 17절의 내용은 말라기 4장 5,6절을 확인해 주고 더욱 명확히 한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그러므로 오리라한 엘리야는 엘리야 그 자신이 아니고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와서 엘리야처럼 사역하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말라기에서 언급된 선지자는 예수님 초림의 선지자인가 아니면 재림 전에 오는 선지자인가? “여화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분명 예수님의 재림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을 엘리야라 예수님이 인정한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명백하다. 예수님 초림의 상황을 재림의 상황의 그림자로 볼 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실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해서 알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성경 예언의 목적은 무지하고 예비하지 못한 그들을 돕는 일에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이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신다. 초림 상황도 재림 상황도 마찬가지다. 초림의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에게 심판은 두렵게 임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나라가 주후 70년 부터1948년까지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완전히 고아 같은 민족이 되어 핍박과 죽음, 그리고 서러움을 받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문제는 재림의 주님을 위해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과 세상은 그보다 더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된다. 첫 번째의 그림자를 보고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명확히 할 일이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엘리야도 아니고 오리라 한 그 선지자도 아니라 했다.(요1:21) 그런데 예수님은 그라고 했으니 어긋난다. 이 딜라마를 나는 이렇게 본다. 우선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와 삶을 드리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달리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이 주장해서 선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함께하시는 예언과 표적으로 백성들로부터 불리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백성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 질문을 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질문의 목적이 세례 요한을 책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마치 예수님이 메시아이지만 제자들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한 것과 같다. 개념이 잘 못되어 있는 백성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말라기 예언의 초점은 예수님 재림의 상황이다. 세례 요한은 이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여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엘리야이다.
4. 오워 박사에 대한 이해와 오해
이제 오워 박사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기독교 역사에 그리고 근래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로 불리움을 받거나 선지자적 사역과 능력이 나타난 사람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종말 선지자, 말라기에 기록된 엘리야를 두고 살펴보려 한다. 말라기가 예언한 선지자는 단수로 한 사람이다. 세례 요한이 초림의 예수님을 예비시키는 독보적인 존재이듯이 재림의 예수를 예비시키는 독보적인 존재를 찾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심지어는 세상도 이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 종말 선지자가 그 이전에 와야 하고 또한 이 선지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의 대언자이기 때문이다. 또 그 종말 선지자 엘리야에게는 성경에 감추어진, 봉인된 진리들이 열려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감추기 위한 예언의 말씀이 아니고 때가 되면 열려져야 할 예언서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 때는 바로 그 종말 선지자가 올 때이다. 종말 선지자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실 때가 되었는가? 세상의 징조를 보아 그렇다. 말씀의 예언을 보아 그렇다. 그러면 종말 선지자가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는가? 그렇다. 성경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말 선자자가 나타났는가?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는 보내어졌다. 성경에 예언대로 종말적 사역을 하는 자가 그 선지자이다. 이 관점은 가장 상식적이고 또한 성경적이다. 이 관점에서 눈에 나타나는 종말 선지자다운 사역자가 있는가? 내가 믿기에는 그렇다. 오워 박사의 메시지와 삶을 그리고 그 따르는 기사와 표적을 볼 때 그렇다.
우선 오워 박사의 메시지 가운데 참 선지자에 대한 분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그 메시지가 성경적이어야 하고 둘째, 선지자로서 예언을 한 것은 다 이루어져야 하고 셋째, 회개를 선포해야 하고 넷째, 오실 주님을 선포해야 한다고 했다. 엘리야의 사역이 그랬고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그러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회개의 메지지는 절실하다. 때를 볼 때 재림의 메시지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현재의 한국 교회와 세계교회의 상태를 볼 때 회개의 메시지는 너무나 절실하다. 죽고 살기로 회개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세계교회는 ‘예수재림 둔감 증후군’을 앓고 있다. 사단의 작전이 이제까지 크게 성공했다. 이것도 성경에 예언된 일이기에 더 명확하다. 지식과 말로는 때가 왔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준비하지 않고 있다. 세상도 교회도 본질보다 눈 앞의 일에 더 바쁘다. 영원한 가치의 본질의 추구는 성적 쾌락과 물질 사랑, 그리고 세상 명예의 유혹에 빠져 날마다 내일로 연기하다가 결국 힘이 다 빠져버린다. 사단의 전략에 빠진 것이다. 재림의 날을 말했던 비 성경적 예언들이 다 틀렸다고 해서 재림을 말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이 엄청 많은 그 대열에 들어갈 것이다.
이제 오워 박사와 그 사역에 대한 비판 이론들을 생각하려 한다. 진리는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외국에 사는 사람으로 두 달 전만 하더라고 오워 박사를 전혀 몰랐다. 우연히 YouTube 동영상을 접하면서 나의 눈길이 멈추어졌다. 그리고 한국에서 비판적 시선이 있다는 것도 순전히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 주제가 중요하므로 비판과 그 검증도 중요하다.
우선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자가 되기까지의 삶에 대한 의문을 재기하는 말들이 있다. 나는 엘리야의 출신 배경은 아직 연구하지 못했고 세례 요한의 경우는 정말 경건한 어머니와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를 표면적으로 보면 완전 실망이다. 예수를 핍박하는 죄인의 괴수로서 절정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 의문에 대한 나의 소견은 바울에게 분명 내적 갈등이 크게 있었을 것이고 그가 믿는 바 진리에 대한 소신의 정열적 삶이 하나님 앞에 보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때로 차이가 있으니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남겨져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바울의 삶을 볼 때에 하나님의 택함과 지혜가 옳았다.
또한 오워 박사는 신학을 공부하거나 목회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엘리사를 엘리야의 갑작스런 후계자로 부를 때의 상황, 그리고 베드로를 예수님이 부르실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꿈과 환상을 기초로 한 메시지와 성경해석에 대한 반대 이론이 있다. 성경 말씀 연구에 머리띠를 두르고 산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가 아닌가 이다. 특별히 감추어진 사실들을 하나님이 해석하시게 할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한다. 밧모섬의 요한에게 그리고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계시의 문과 해석의 문을 열어주셨는가? 꿈과 환상이었다. 연구가 아니었다. 선지자 요엘에게 종말에 나타날 일들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8) 더욱이 이 말씀은 말세에 나타날 예언으로 신약에서도 인용 확인된 말씀이다.(행2:17) 성경적이란 말은 학문적이라는 말과 구분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몇 일 전에 오워 박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 설교를 할 때에 휴거가 이루어졌는데 그 집회에서 휴거되지 못하고 남겨진 많은 사람들이 크게 후회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말에 안티 오워가 생겼다. 아들도 천사도 모르는 그 때를 오워 박사가 안다고 했으니까 더 이상 오워 박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고 불쌍히 여겨서 기도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오워 박사의 이 계시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어떤 측면에서 이 계시를 보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장소는 분명히 말했고 때는 집회의 때라고 했는데 이 표현을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균형있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그 알고 있는 나라와 장소를 언제 보낼 것인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곳에 하나님이 한 번 보내실지 아니면 그 장소가 케냐가 되어서 일년에 열 번 보내실지 오워 박사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대 그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에 비 성경적이라고 쉽게 낙인 찍는 일은 심각하다.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정말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엄중하게 처리하실 수 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막연히 휴거를 생각하니까 정말 휴거가 가까웠다는 실감하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말함으로 정신차리고 대비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도리이다.
오워 박사가 정권과 밀접하다는 견해가 있다. 청렴해야 할 하나님이 종이 부유층이나 권력층에 가까우면 참 선지자가 아니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다니엘은 어디서 예언활동을 하며 누구와 같이 생활했는가를 생각하면 무조건 정권 밀착이 사이비라는 설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선지자의 삶의 위치와 활동의 위치를 정하신다. 하나님을 간섭할 수는 없다.
또한 오워 박사의 성격에 대한 이견으로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 오워 박사가 너무 냉정하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사람인지 의심하는 경우를 말한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먼저 아무리 큰 선지자도 인격과 신앙에 결점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엘리야는 죽여달라고 기도했고 세례 요한은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메시야를 다시 확인하는 질문을 예수님께 했다. 두 경우를 크게 확대하려고 하면 엄청난 논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문의 중심 의도와 그들의 약함을 아셨다. 그래서 어루만져 위로하심으로, 또 성경말씀으로 친절히 받아주셨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도 국가의 지도자로서 덕도 안되고 얼마든지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세 누이 미리암의 불평에 하나님은 지극히 엄격히 벌하셨고 보기에 따라서는 편애적인 답변을 하셨다.(민12장)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우선하며 또한 모세의 삶의 큰 결단과 헌신을 귀히 여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론과 미리암은 큰 것을 보지 못하고 교만하여 넘어졌다.
둘째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선지자의 냉정함은 하나님의 대리적인 시험의 방법으로 볼 수 도 있다. 병들어 멀리서 온 아람의 국빈 군대장관 나아만을 대하는 엘리사의 태도는 인간적 각도에서는 너무 심했다. 그러나 신앙적 측면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낮아짐의 시험이었다. 그의 중심의 결단을 테스트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공식 자리에서 전하는 말씀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우선 경외함으로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말씀을 전파하며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적인 시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두려움으로 검증할 일은 따로 있다. 이제 제일 중요한 검증을 말하려 한다.
5. 광야의 사람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광야의 사람이다. 광야는 사람들과 격리된 고독의 장소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가까이 하려면 세상 소리가 시끄러운 곳을 피해야 한다. 광야의 사람은 자신이 광야를 찾기도 했고 하나님이 그곳으로 인도 하시기도 했다. 엘리야를 생각하면 갈멜산이 떠오르고 하나님은 그가 늘 광야를 횡단하며 격리된 삶을 살게 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삶도 사역도 광야에 있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삶이 40년 그 백성과 함께 한 광야의 삶이 또 40년 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몸은왕궁에 있었어도 그의 마음은 고통 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미 광야에 있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5) 다니엘도 그의 삶은 왕궁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머나먼 광야 저편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면 날마다 창문을 열고 3번씩 목숨을 걸고 큰 소리로 기도했겠는가?
그러므로 참 선지자는 광야의 사람으로서의 특성을 가져야 한다. 사실 예수님은 광야생활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종된 예수님이, 아니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에서 실종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홀로 아버지의 집에서 기뻐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광야 마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주님의 공생애의 습관은 새벽부터 아버지와의 고립을 즐기시는 것이 습관적 삶이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는 참 하나님의 사람을 구분하는 일에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참 하나님의 사람은 삶의 모습이 하나님 사람다워야 한다. 오워 박사의 삶과 사역은 많은 금식기도가 삶과 사역의 근본이다. 집회를 앞두고 보통 열흘 철저한 단식(dry fast) 그리고 집회를 인도할 때에도 할 수 있는 한 금식하며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신다. 이러한 삶이 늘 연속된다는 것은 그 마음이 광야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말 선지자의 표적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천사를 통해 전달된 이 예언의 말씀은 말라기 4장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된다. 오실 메시야를 전하는 그 선지자의 심령은 예수님의 중보의 심정과 삶을 가진 자이다. 그러기에 먼저 아버지께 나아가 긍휼을 구하고 또한 그 백성이 오실 주님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기 위하여 찾아 나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는 증거로서 예언은 성취되고 사역에는 크신 능력으로 함께하신다. 권세 있는 자의 말씀으로 따르는 표적과 기사로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의 사람’인 것을 나타내신다.
글을 맺으려 한다. 선지자 엘리야는 1:850의 영적 싸움에서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아합 왕 앞에 혼자만의 개선 행진을 하였다. 성령의 권능과 하늘의 천사들이 함께하였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로 승리한 그 명백한 승리의 순간에 왜 그는 혼자만의 개선행진을 하였는가? 하나님의 선지자의 심령을 이해하는 자가, 하나님의 선지자 편에서 나타나는 자가 그렇게도 없었다.
정말 오워 박사가 오리라한 엘리야의 가능성이 있는 분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며 대하여야 하는가? 사실 나에게도 100%의 확신은 없다. 기도가 깊지 못해서 누구처럼 이 분에 대해 응답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의 객관적 성경적 양심적 관점에서 믿어지기 때문에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쓴 것이다. 누군가가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분명한 깃발을 들어야 하는데 이 중요한 주제가 파묻혀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글을 정리해 본 것이다. 나의 확신이 100%에 미치지 못해서 어느 날 정말 더 훌륭한 예언된 그 선지자가 나타나 내 마음을 바꾼다면 하나님이 책망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은 나의 믿음과 소신의 동기를 아시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믿어지는데 사람의 비판이 두려워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입다물고 있다가 주님이 오신다면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옥합을 완전히 깨뜨려 주님을 증거하며 거룩한 사랑의 심정을 고백한 그 여인까지는 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엘리사를 나아만 장군에게 소개한 어린 소녀는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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